늘어지게 늦잠을 잔 것도 아닌데 눈떠보니 9시가 넘었다. 밖은 여전히 안개가 짙어서 아직도 새벽인 것만 같았다. 오늘부터는 정말 메이와 레몬 단둘이 떠나는 신혼여행이다. 내비게이션에 찍을 장소들을 정리하고 서둘러 조식을 먹으러 나왔다.

조식 of Fosshotel Glacier Lagoon JMTJMT

Fosshotel Glacier Lagoon은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맘에 쏙 들었지만 조식은 또 한 번 감동을 주었다. 음식 하나하나 맛없는 게 없었고 종류도 다양하면서 알찬 구성이었다. 몇 접시를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후에 커피 한 잔 마시고 10시 넘어서 저녁을 먹었으니까 배터지게 먹은 건 확실하다. 체크아웃 30분 전까지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일정에 특별한 시간약속이 없으니 한없이 밍기적거려도 좋았다. 느릿느릿 우리만의 여행.

아무리 늦장을 부려도 안개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요쿨살론에 도착할 때까지 그저 눈앞의 길만 보며 직진했다. 별안간 큰 철교를 지나는가 싶더니 내비게이션이 요란하게 지금 좌회전을 하라고 외쳤다.

짙은 안개 때문에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뻔했다. 철교 지나자마자 좌회전!

좌회전을 하고 나서야 표지판이 보였다. 조금은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에 천천히 앞을 보았지만, 진입로 뒤로는 안개만 보일 뿐이었다. 다시 침착하게 안개 속으로 전진. 허망하게도 50미터쯤 들어가자 차들이 한가득 주차되어 있었다. 마침 자리가 보여서 곧장 주차를 했다. 자리는 왼쪽에 났고 한 번에 들어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차를 살짝 틀었다. 그 순간이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약 5초 뒤, 직진으로 차를 밀어 넣고 P까지 기어를 올려 주차를 마쳤다. 그리고 시동을 끄는 동시에 그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주차장에 들어가면서 좌측에 바로 주차하면 보이는 광경

양옆의 차와 앞쪽 간격을 보느라 안개가 아주 살짝 걷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시동을 끄는 순간 그제야 앞에 보이는 장면을 알아봤다. 빙하가 눈앞에 있었다. 파란 눈덩이 같은 빙하가 안개를 두르고 있었다. 그 안개를 뚫고 내 눈을 통과한 푸른빛은 그대로 눈물이 되어 튕겨나왔다. 몸이 굳었다. 차오르던 눈물이 신음이 되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때 그 신음이 “아”였던가 “어”였던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처럼 시동을 끄면서 한순간의 경직이 있었고 신음과 함께 나는 오열했다. 첫 음은 신음이었지만 그 뒤는 흐느낌이었다. 흐윽흙흐허헉얽흑흐읅그흑ㅎ어헉흑

메이는 얼마나 놀라고 황당했을까. 멀쩡히 운전하다가 주차를 마친 순간 갑자기 그대로 멈춰서 폭풍눈물을 흘리는 새신랑이라니. 평소라면 왜 그러냐 괜찮냐를 연발했을 텐데 그땐 한참을 기다려준 뒤에 나를 쓰다듬어주며 딱 한 마디를 했다. 괜찮아. 나도 나대로 당황해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서야 겨우 미안하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왜 그래. 많이 힘들었어?”

“아니, 힘든 건 없었어. 빙하 때문에 그래.”

“빙하?”

“응. 나 빙하를 어렸을 때부터 너무 보고 싶었어. 근데 빙하가 눈앞에 있잖아.”

마지막 말을 마치면서 나는 다시 울었다.

Jökulsárlón: 메이와 레몬의 인생 첫 빙하. 호숫가에 서 있기만 해도 좋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겨우 밖으로 나와 보트 투어 매표소로 갔다. 보트는 약 30분 간격으로 출발했는데 그렇게 일정하진 않은 것 같았다. 15분 뒤에 승강장으로 오라고 하길래 호숫가를 잠깐 구경하고 왔다. 차 안에서는 정면에 있는 얼음만 보였는데 밖에 나와서 보니 큰 빙하들 수십 개가 호수를 덮고 있었다. 수륙양용 보트를 타고 저 호수를 누비며 빙하들을 가까이에서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저기 보트가 온다

구명조끼를 입고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안내받은 뒤 보트가 출발했다. 빙 돌아서 어딜 가나 했더니 빙하가 없는 호수 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물속으로 풍덩! 보트 운행으로 전환된 수륙양용 보트가 물을 가르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한참 요쿨살론에 관해 설명하며 떠내려가는 작은 유빙을 건져 올렸다. 예상대로 작게 부셔서 한 조각씩 승객들에게 건냈다. 구경만 하는 사람, 살짝 맛만 보는 사람, 그리고 나처럼 오독오독 다 먹는 사람.

물론 이걸 통째로 먹은 건 아니고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안전상의 이유 때문인지 보트가 생각만큼 빙하 가까이 가진 않았다. 마음속으로 계속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가달라고 외쳤지만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 어쨌든 물에 떠 있는 이상 눈에 보이는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렸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도 빙하는 아주 컸다. 웬만한 빌라보다도 훨씬 컸다. 그저 호숫가 방향에선 볼 수 없는 안쪽 빙하들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아 참, 마침 작은 유빙들 위로 올라와 쉬던 물개 가족들을 만난 것까지.

그저 막연하게 큰 얼음덩어리를 상상했던 내게 처음으로 나타난 빙하. 파란 물감을 가득 머금은 기괴한 모습으로 굳어버린 눈 덩어리. 그리고 바스락, 타닥, 퐁당 하고 조용히 녹아가는 빙하가 들려주던 이야기. 요쿨살론은 내가 처음 겪은 스탕달 신드롬이자 아이슬란드가 준 깜짝 선물이었다.